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체제의 모순과 누적된 병폐 === '고난의 행군 이전에 북한이 정상적으로 굴러갔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수의 출처불명 소스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는 복지국가라는 주장까지 있지만 이는 허구에 가깝다. 1990년대 북한의 사회 경제적 고난의 행군 과정을 이해하려면 [[북한/경제/역사|북한 경제에 대한 대략적 이해와]],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에 이미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한계에 다다른 경제 상황을 보아야 한다.]] 6.25가 끝나고 1960년대까지는 남북한 모두 힘겨운 시기였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과 서방권의 지원으로 북한은 동구 사회주의 동맹과 중국의 원조로 굶어죽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1960년대 북한 생활수준이 높았다는 건 신뢰하기 힘들다. 당시 출신성분이 좋아 김일성대를 졸업한 [[김길선]]과 조선중앙TV 기자 출신 장일선도 1960년대 지방에선 어느 집이건 강냉이밥이라도 두 끼나 먹지 세 끼 챙겨먹는 집이 없었다며 남한에서 북한 측이 1960년대에 잘 살았다는 소문을 근거없다고 부정했다. 생활수준이란 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긴 하지만 [[천리마 운동]]으로 주민들을 쉬는 날 없이 노력동원 시키면서 '새벽별 보기 운동' '천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이나 시키던 북한의 1960년대는 결코 윤택한 수준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60년대엔 북한이 잘 살았다는 말은 북한이 선진국 수준으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당시 남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잘 살았다는 뜻이다. 실제 1960년대까지 남한은 가난한 농업국가였고 이제 막 산업화에 첫 발을 디딘 시점이었다. 남한의 1인당 GDP가 북한 1인당 GDP를 역전한 시점이 1974년이다.] 1958년에 북한을 탈출한 김책군관학교 교장 출신 장학봉에 따르면, "전쟁이후 주민생활 형편이 점점 악화되었는데 극빈하게 되면서 한 민족을 갈라서 종파를 가르고, 연안파니 소련파니 하면서 딴 민족, 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생활은 점차 구차하게 되고 일반백성들은 정책이 옳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불만을 토로하다가 당시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하지만 밀고자에게 큰 혜택을 베풀어, 출세를 원한 밀고자에 의해 이런 불만은 제압당했다고 한다. 신장으로 따지고 보면 북한이탈주민의 경우 남성은 해방 이후 출생자부터, 여성은 50년대 초 출생자부터 남한 출신에 신장이 역전되었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의 주 출신지인 함경도 일대는 분단 전만 해도 남북한에서 가장 키가 큰 지역이었는데도 역전을 당한 것이다. 국부가 많아 1인당 GDP는 많을 수 있어도, 실제로 주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었을 수 있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4062481608|#]] 그나마 1970년대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한 시기라 하여 북한 주민이나 탈북자들이 이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소련이나 동구권과의 무역의 탈을 쓴 원조나 내부에서 긁어낼 대로 긁어낸 것들을 통한 표면적인 번영이었을 뿐, 이미 1970년대에 북한의 경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1972년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북한의 국채|북한의 대외 채무]]는 1974년부터 지불능력이 없음을 드러냈고 1976년 스웨덴, 서독,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의 채권단으로부터 채무상환유예(rescheduling)라는 명목으로 대량의 탕감을 받았으나[* 일본에게는 1983년 일부 탕감을 받았으나 1984년부터 상환을 거부했다.] 오히려 배째라식 버티기로 점점 늘어나 결국 북한은 1980년 중반 이후 채무상환 능력을 상실하여 원금은 말할 것도 없고, 이자조차 거의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상의 지불 포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의 IMF 상황보다 더 심각한 외환 상황이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약 20년 전에 이미 도래했던 것이다. * 출처: KDI 북한 경제 리뷰 2012년 3월호 이런 외환 사정은 1980년대부터 한계에 봉착하여 북한은 외교관들에게 월급과 외교공관 운영비가 중단되어 한때 120여개 해외공관을 1990년대 초 40개로 줄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충성자금 할당은 전혀 줄지 않아 마약 밀수를 저지르다가 추방되고, 외교관들이 한국이나 미국등 서방국으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태영호]] 현 [[국민의힘]] 의원이 있지만, 전문 외교관 출신은 10여명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외화기업, 정찰총국 보위요원을 합치면 수십여건인데 한국으로 탈출시 북한에 남은 가족들 처벌이 혹독하기 때문에 서방과 미국으로 간 경우를 합치면 몇배 더 많다고 한다. 김동호 박사에 따르면 외교관 뿐만 아니라 고위탈북자 출신이 한국에 김일성대 졸업생 출신과 평양외국어대 출신이 약 7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북한/경제/역사]]에서 보듯이 1980년에 북한의 경제는 성장은커녕 실패의 연속이었고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북한이 1인당 GDP는 1975년에 남한에 추월당하는데 이후로의 안드로 차이는 무시하고 1975년에 과연 남한이 복지 체계가 있었나 보면 답이 나온다. 무상의료도 아닌 전국민 의료보험은 1989년에야 남한에서 가능했는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니 대외에 표방하는 선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북한의 구매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다. 사실 무상의료 무상배급은 예산 500조 원인 대한민국에서도 불가능하다. 북한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는 1989년 785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뒤 1990년에는 -8.2%로 마이너스 성장을 찍으며 725달러를 기록하는데 이는 1982년 수준인 715 달러와 비슷한 수치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past_and_projected_GDP_(nominal)_per_capita|#1]], [[https://countryeconomy.com/gdp/north-korea?year=2000|#2]] 즉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이미 1970~1980년대 부터 망해가고 있었다. 소위 황금의 70년대에 제공되었다는 북한에서 표방하는 무상의료 수준이라는 것도 우리나라 보건소 관리 수준으로[[http://web.archive.org/web/20150923041443/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sumryMenuId=SO315| 의사가 담당지역 주민의 가정을 연 1∼4회 순회하면서 의료상담, 치료 및 위생교육 등 체계적 진료를 하도록 되어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과다한 의료대상, 넓은 진료범위, 의약품 부족 등으로 대부분 형식적 진료행위에 그친다.]] 이를 근거로 북한 무상의료를 북유럽의 무상의료 수준으로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은 대외에 표방하는 선전의 도구이지 실제로 북한의 경제력의 한계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거 소련에서 "노동자의 천국, 지상낙원, 인류최초 남녀평등 실현, 무상복지 무상의료 교육" 타령을 그대로 북한에서 써먹은걸 과거 운동권들 처럼 무비판적으로 순진하게 믿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북한에선 1980년대 중반부터 평양에서 조차 의약품 공급 중단으로 예방접중이 중단되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환자들이 약을 구해서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고난의 행군시기엔 마취제없이 술을 먹여 수술을 시킬 정도로 의료기반이 붕괴했다.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간호장교로 1980년부터 11년간 개성지역 전방군단에서 복무한 [[이순실]]의 기억으로는 배급이 그나마 잘 나온다는 전연 2군단 15사단에 근무했는데[* 김일성이 현지지도 할때 일당백 칭호를 내려준 곳이라 우대 관리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미 1986년도부터 인민군에 된장과 간장 공급이 중단되어 약탈에 나섰고, 오후 한끼는 강냉이죽에 뽕잎을 섞은 푸레기죽(풀죽)을 먹어야 했으며 환자 대다수는 영양실조였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총참모부]] 군관 출신 [[임영선]]에 따르면 이미 1986~1987년도부터 인민군에 허약이(영양실조)가 퍼졌고, 1990년에 총참모부 직속 병원에서 영양실조 군인 병동을 차려서 집단 수용할 정도로 만연했다. 그렇다고 1970년대 북한이 살만했던건 상대적 평가로, 공식적으로 1인당 GDP가 1975년에야 남북한이 역전되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믿을만한게 못되는게 1971년에 입대하여 1979년에 탈북한 안찬일 박사도 회고하길, 자신이 출신성분과 토대가 좋아[* 안박사가 집안이 평안북도 신의주에 아버지가 6.25참전병 출신이라 출신성분이 좋아서 대학에 입학했고 탈북 당시 70년대에는 대학생에게 입영 면제 혜택이 있음에도 자원입대하여 조선로동당 입당도 하고 전역 직전 부소대장 상사 였으며 김일성종합대 진학 추천을 받은 상태였다. 다만 원래 정치장교를 희망하여 김일성정치대학 추천을 원했으나 빽에 밀려 김정일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비리를 고발하고 탈북했다.] 정찰총국 산하 판문점 민경대대에서 특별 공급을 받으며 복무했음에도 지나가는 차량 수 헬기와, 남한 군인의 피복[* 민경대대는 모직제품을 입히고 일반 군인은 혼방제품으로 군복을 지급했다고 한다.]과 체격수준으로 월등하게 남한이 앞서는걸 느꼈다는데 귀순후에 보니 일반 북한 군인은 지하족이라고 부르는 천조각 입한 고무신을 신고 오직 정찰총국과 호위사령부만 가죽 전투화 그마저도 돼지가죽 신발인데 남한에선 개나소나 소가죽 전투화를 신고 있어 놀랐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GDP는 일반적으로 부풀려지는 경향이 존재하기에(정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실질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남한이 GDP를 추월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안박사가 복무한 민경대대 조차 특별 공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쌀만 충분하고, 나머지 간장이나 된장 반찬은 자체 해결해야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제대 후 추천을 받아 [[김일성종합대학|김일성종합대]]로 진학한 군대고참이 방학때 밥얻어 먹으러 부대로 면회[* 북에서는 당시 전역 후 6개월 까지는 신분증이 유효해서 복무 부대에 오는게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생필품 수준이 열악하고 중국과 밀무역도 제한적이라 제대 전후로 군대 보급품 빼서 팔아먹거나 제대자들이 브로커로 대신 팔아줘야 장사밑천 장가밑천을 마련해서 먹고살았다고 이순실도 여군들은 특히 군용 여성속옷이나 모포 품질이 공산품 품질보다 훨씬 좋아서 몇개 팔아먹어서 혼수 밑천 장만하는게 당연시 되었다고 한다.]오는걸 보며 김대출신이 평소 밥도 잘 못먹는 북한 체제의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1973년 모친상으로 휴가를 얻어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열차를 소달구지 속도로 도착했을때는 이미 사망한지 13일이 지나 장례까지 마친상태였으며 묘에 가서 제를 올릴 술 한병 조차 공급표가 있어도 국가상점이 텅텅비어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강철환]]은 1989년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요덕군에 있는 한 농장에 배치되었는데, 10년만에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체감했다. 10년 전엔 안전원이나 보위원들에게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나, 10년 후에 나온 사회는 뇌물천지였던 것이다. 재일교포에 일본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농장으로 보위원 안전원과 군당책임 비서까지 나와서 한턱 얻어먹으려고 매일 줄을 섰다. 결국 뇌물로 농장을 탈출해 좋은 직장인 국가상점에 재배치되었고, 평양과 지방에 출장이 자유로운 직책인 소비재 구매원으로 옮기고 나서 [[김책공대]] 입학 준비를 하는데 이것도 뇌물로 당시 10만 엔이면 추천입학이 되었다.[* 탈북을 먼저해서 입학하진 않았다. 훗날 한국에서 한양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및 졸업했다.] 평양에서 친구들과 단파 라디오와 남한 노래를 듣고 김일성 김정일 욕을 해도 이미 뇌물을 뿌려 친해진 보위원이 자기 아들 딸 장가갈 때 도와준 보답으로 진짜 [[려행증]]도 구하고, 체포도 면해 탈북을 했다고 한다. 10년 전에 할아버지가 말반동으로 잡혀가 온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인데, 강철환이 겪은 바로는 1991년에 이미 함경남도 검덕지구 광산[* 북한 최대 아연, 납, 마그네사이트 생산지]에 배급이 중단되어 무리배치된 제대군인 수천명이 대규모 쟁의를 일으킬 정도로 북한 사회가 흔들렸다고 한다. [[강명도]]에 따르면 이미 1980년대부터 [[코크스]]와 중유 부족으로 청진제철소 용광로 세개 중에 하나만 가동되었고 하루 생산량이 고작 800~900톤에 그쳤고 1989년에는 아예 제철소 용광로 불을 꺼먹을 정도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생산량을 연간으로 쳐줘도 30만 톤인데, 현재 한국의 포스코가 포항제철소에 70년대 건설한 제1고로만 해도 생산량이 연간 150만 톤에 기업 전체 연간 조강량은 900만 톤 정도다. 제철이 산업의 "쌀"이라고 할 정도로 기초적인 산업인데 극심한 철강 부족량의 여파가 경제 전체로 퍼지는건 시간문제였다. 결론적으로 수치상으로만 1994년 내지 1995년에 터졌다고 알려졌을 뿐, 고난의 행군은 1994년에 즉각 터진 것이 아니라 수년전부터 위기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김길선]] 기자와 탈북 철도 엔지니어 양영일의 기억으로는 이미 71년부터 한달에 두번 15일 배급을 줄 때 이틀치는 전시 비축용 용도라며 공제했고, 80년대 이후 인민군대 지원용 기타 다른 용도로 감량지급이 되어 집안에 노인이 있는 집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인민군 징병자들은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강냉이와 염장무로 연명하는 처지였다고 전했다. 80년대 후반에 여러 공장과 기업이 원료부족으로 문을 닫고 군수공장 가동률도 형편없이 떨어져 김일성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김정일의 자력갱생으로 원료를 수입해 와서 무조건 가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공장 노동자 사무원은 물론 기자들 까지 시골에 가서 사금을 캐고 간부들은 숙청을 피하려 달러벌이에 나서면서 부패에 빠져 사회전반이 망가졌다고 회고했다. 최근에도 유투브에서 6-70년대 북한이 잘 살았다는 주장은 대부분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젊은 탈북자들이라며 굶는게 일상인 힘든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탈북 외교관 [[고영환]]에 의하면 북한은 몽골에 통조림, 담배, 가위나 학용품 따위를 수출하고 코크스를 물물 교환 형태로 수입했는데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국가간의 신뢰 거래였다. 한번은 몽골 국영 상품점에서 북한산 가위가 왜이리 안팔리냐 물어보니 "너희 나라는 가위를 만들면 종이가 잘려야지 (불량품을) 누가 사겠냐"라고 타박을 받았다. 그나마 과일 통조림이나 담배는 조금 팔렸다고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조잡한 북한산은 아무도 사려하지 않고 당연히 코크스 구입도 끊겼다. 비슷하게 동독의 예를 들 수 있다. 동구권 사회주의중의 모범생으로 선진 산업 국가로 사회주의권에 기술집약적 제품수출을 선도한 동독의 경우, 통일 전 1989년 동독의 1인당 소득은 남한의 두 배에 달했고,구매력 기준으로 1만 달러에 육박했으며 공산권 세계의 종주국인 소련보다도 높았다. 이 수치는 서독의 1인당 소득의 63%에 육박했기 때문에 통일 후에도 가까운 시일안에 경제적 통합과 평준화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적인 전망도 있었지만, 실상은 동구권 GDP의 과대평가임이 드러났다. 동구권과 사회주의에서 선전하는 무상의료니 무상주택이니 하는 것은 물자나 서비스의 질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국통화의 공식 환율과 암시장과 시장가와의 수십 배의 차이가 날 정도로 구매력에서는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라반트|동독의 생산품의 질은 시장경제에서 팔릴 수 없는 수준]]이었고, 산업 설비는 스크랩(고철)처리 되었기에 동독에선 거의 완전히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준의 경제재건이 이뤄져야 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동독의 생활 수준은 남한의 2배는커녕 남한 자체에도 미치지 못했다. 북한은 건국 이래 배급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적이 없다고 한다. 경제가 잠시 반짝 하던 1960년대 후반기에는 배급이 아니라 식량과 생필품을 자율판매했다. 그러나 [[https://www.rfa.org/korean/copy_of_kim_dynasty/kim_dynasty-05012008150823.html|협동농장 체제로 바뀌면서 농촌 생산성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농촌에선 밤에 협동농장서 비료 한주먹 훔쳐다가 자기 텃밭에 뿌리는 식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고, 텃밭을 갖출 수 없는 평양같은 도시는 물론 배급에서 더 혜택이 있긴 하지만 특히 지방은. 무상 의료 수준이란게 농촌에는 병원이 없고, 도시에 가면 병원가도 약이 없고 입원을 하려면 뇌물을 써야하고... 해서 스스로 약초캐서 달여 먹는 그런 수준의 무상의료였다고 한다. 무상교육이라는 것도 11년짜리 무상교육을 받긴하나 교육과정에 허구한 날 동원에 농촌 모심기전투, 김매기 전투, 오리키우기, 토끼키우기, 고철줍기, 산나물캐기, 김일성 우상화 운동이나 건설 작업에 투입되어 남자는 대부분은 의무교육 과정 졸업년도 중간에 입대하고 출신성분에 따라 대학 군대 공장 탄광 농장이나 건설현장으로 배치되는 게 북한식 무상교육이었다. 즉 사회주의 경제는 배급제로 구매력을 보완하는 기능도 있는대신 물자와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도 반영하지 못하는 요소도 분명히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